아빠와 난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을 기록하는 소중한 일기장
책상 서랍 깊숙이 묵혀 두었던 작은 공책 한 권을 꺼냈던 날이 떠오릅니다. 구겨진 모서리를 손끝으로 펴 보니, 초등학교 시절 아빠와 함께했던 기억들이 한 줄 한 줄 또렷하게 살아났습니다. 일기장이라 부르기엔 허술한 줄 공책이었지만, 그 안에는 아빠와 눈을 맞추며 웃고, 서운해하고, 화해하던 어린 날의 내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아침마다 함께 걷던 등굣길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이든, 살을 에듯 추운 겨울이든 아빠는 늘 같은 시간에 현관문을 열고 서 있었습니다. 신발 끈을 매다가 한 번, 가방을 메고 나가면서 또 한 번 뒤를 돌아보면, 아빠는 늘 “우산 꽉 잡아라”라고 말하며 우산을 살짝 내 쪽으로 더 기울여 주었습니다.
등굣길은 길어야 10분 남짓이었지만 그 안에서 하루치 대화를 다 나누곤 했습니다. 전날 친구와 있었던 일, 숙제를 깜빡 잊은 이야기, 급식 메뉴에 대한 기대 같은 사소한 이야기들이 아빠에게는 중요한 뉴스처럼 들려졌습니다. 학교 정문 앞에 다다르면 아빠는 늘 몇 걸음 전에서 멈춰 서서 “여기까지만 같이 가자”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괜히 친구들이 볼까 쑥스러워하던 나를 배려한 작은 선이었지만, 그 선을 넘기 전까지는 늘 손을 꼭 잡아 주었습니다.
숙제 앞에서 마주 앉던 저녁 시간
숙제를 미루고 놀다가 늦은 밤이 되어서야 국어 공책을 펼쳐 들곤 했습니다. 한숨을 쉬며 끄적이던 글씨를 본 아빠는 조용히 밥상 맞은편에 앉았습니다. “하루만 쓸 거 아니지? 내일 네가 다시 봐도 읽을 수 있는 글씨로 써 보자”라며 지우개를 건네던 모습이 아직도 또렷합니다.
받아쓰기 시험에서 몇 문제를 틀려 속상해하던 날에는 틀린 단어만 따로 공책에 적게 하고, 그 옆에 아빠가 비슷한 예문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덕분에 맞춤법 공부가 숙제가 아니라 놀이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많았습니다. 그때 적어 두었던 단어들이 훗날 일기장을 쓸 때 큰 도움이 되었다는 걸,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조용한 밤, 둘만의 일기 쓰기 시간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은 늘 거실 한쪽 작은 스탠드 아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빠는 낡은 공책을 펴고, 그 옆에 내 일기장을 올려놓게 했습니다. “오늘 있었던 일 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한 가지만 써 보자”라는 말은 늘 같았지만, 그날그날 떠올리는 장면은 매번 달랐습니다.
처음엔 “오늘 학교에 갔다. 밥을 먹었다. 놀았다.”처럼 단순한 문장뿐이었는데, 아빠는 거기에 질문을 덧붙였습니다. “누구랑 놀았는데?”, “그때 기분이 어땠어?”, “다음에는 어떻게 하고 싶어?”라고 물으며 한 줄을 세 줄로, 세 줄을 한 페이지로 늘려 갔습니다. 그렇게 쓰인 문장들 사이에는 어린 마음의 기쁨과 서운함, 기대와 걱정이 솔직하게 녹아들었습니다.
아빠도 가끔 자신의 공책에 무언가를 적고는 했습니다. 무슨 내용을 쓰는지 보여 주지 않았지만, 펜 끝이 잠시 멈출 때마다 시선이 내 쪽으로 향하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간은 단순한 글쓰기 연습을 넘어 서로의 하루를 살펴보는 조용한 대화의 자리였습니다.
작은 다툼 후에 남았던 한 줄의 문장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아빠와의 다툼도 조금씩 늘어났습니다. 학원에 가기 싫다고 떼를 쓰거나, 친구들과 놀다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해 혼이 나던 날, 속이 꽉 막힌 듯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 일기장을 펼쳐 든 적이 많았습니다.
투덜거리듯 “아빠랑 싸웠다”라고 적고 나면, 꼭 마지막에는 한 줄이 더 따라붙었습니다. “그래도 내일은 그냥 화해하고 싶다.” 다음날 아침 식탁에 앉으면, 아빠는 마치 그 문장을 읽은 사람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처럼 말을 걸어 주었습니다. 서로 미안하다는 말을 쉽게 하지는 못했지만, 그 한 줄의 문장이 우리 사이에 작은 다리가 되어 주었습니다.
다시 꺼내 본 초등학교 시절의 일기장
시간이 많이 흘러, 낡은 표지가 헤져 버린 그 일기장을 다시 펼쳐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건 글씨의 서툼이 아니라 마음의 솔직함이었습니다. 서툰 맞춤법, 삐뚤어진 줄 간격, 엉뚱한 표현들 사이마다 아빠와 함께 보낸 장면들이 떠올랐습니다. 비 오는 등굣길, 식탁 위의 공책, 쓰다 만 문장 옆에 남겨진 아빠의 짧은 메모들까지 모두 하나의 긴 이야기처럼 이어졌습니다.
아빠와 나, 둘만의 기억을 적어 내려간 그 시절의 일기장은 단지 어린 날의 기록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해 가는 과정 그 자체였습니다. 그때의 작은 습관 덕분에 지금도 하루를 돌아보며 마음을 정리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무엇보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아빠의 목소리와 표정이 함께 떠오른다는 점에서, 그 공책은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기장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