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언덕길을 따라 미술관으로 올라가던 날이 아직 또렷하게 떠오릅니다. 길가에 핀 꽃과 오래된 가로수, 그리고 조용히 서 있는 건물까지, 마치 시간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공기가 달라졌습니다. 바깥의 소음은 사라지고, 유리 진열장 속에서 수백 년을 건너온 유물들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보화비장’이라는 이름답게, 보물 같은 것들이 정말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다가 잠깐 모습을 드러낸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번에 소개할 간송미술관의 전시는 이미 2024년 6월 15일에 끝났습니다. 하지만 전시가 끝났다고 해서 그 의미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날 보았던 작품들과 느꼈던 감정, 그리고 간송미술관이 지켜 온 역사 이야기는 앞으로 열릴 다른 전시를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전시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고, 기억에 남았던 점들을 차근차근 적어 보려고 합니다.
‘보화비장’이라는 이름에 담긴 뜻
‘보화비장(寶華秘藏)’이라는 말은 한 글자씩 풀어보면 더 흥미롭습니다. ‘보(寶)’는 보물, ‘화(華)’는 꽃 또는 빛나는 아름다움, ‘비(秘)’는 비밀스러움, ‘장(藏)’은 간직한다는 뜻입니다. 전체적으로는 “보배로운 아름다움을 비밀스럽게 간직하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간송미술관은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개인 소장 미술품들을 지닌 곳 가운데 하나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간송 전형필 선생이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써가며 우리 문화재를 지키고 되찾아온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그가 모은 국보와 보물급 유물들 가운데 엄선된 작품들을 내어놓은 자리였습니다. 평소에는 수장고에 보관되어 일반에 잘 공개되지 않던 것들을, 짧은 기간 동안 ‘잠깐 문을 열어’ 보여준 셈입니다.
전시 기본 정보 정리
당시 전시는 다음과 같은 일정과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 전시명: 보화비장(寶華秘藏)
- 전시 기간: 2024년 5월 15일 수요일 ~ 6월 15일 토요일 (현재 종료)
- 장소: 간송미술관 (서울 성북구 성북로 102)
- 관람 시간: 오전 10시 ~ 오후 5시 (입장 마감 오후 4시 30분)
- 휴관일: 매주 월요일
- 입장료: 무료 (사전 예약 필수)
예약은 온라인 예약 시스템을 통해 이루어졌고, 정해진 요일과 시간에 다음 주 관람분이 한꺼번에 열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인기가 워낙 높아서 예약이 열리자마자 순식간에 마감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덕분에 관람 인원은 잘 조절되었고, 실제로 관람할 때는 사람이 붐비지 않아 한 작품 앞에서 여유 있게 머무르며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작품들이 전시되었는지
‘보화비장’은 특정 한 분야만을 모은 전시가 아니라, 간송미술관이 자랑하는 여러 종류의 유물들을 폭넓게 보여주는 자리였습니다. 도자기, 회화, 서예, 불교미술 등 서로 다른 장르의 작품들이 한 전시 안에서 어울려 있었습니다.
1.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흙과 불이 만든 기적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 가운데 하나가 자기류, 즉 도자기였습니다. 특히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는 한국 도자기 역사의 정점을 보여주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청자는 부드러운 비취색을 띠는 것이 특징입니다. 흔히 ‘비색청자’라고 부르는 그 색은 단순히 유약만 잘 발라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흙의 성분, 유약의 조합, 가마의 온도와 불의 세기까지 모두 맞아떨어져야만 비로소 완성됩니다. 전시장에 놓인 청자들은 표면이 은은하게 빛났고, 빛을 받을 때마다 색이 조금씩 달라 보였습니다. 일부 청자에는 상감 기법으로 구름, 학, 연꽃 같은 무늬가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얇게 파낸 자리에 다른 색의 흙을 메우고 다시 유약을 입혀 구워내는 이 기술은, 현대의 정밀한 기계가 아닌 손과 감각만으로 완성된다는 점에서 더욱 놀랍게 느껴졌습니다.
조선백자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갖고 있었습니다. 화려함보다는 단정함, 과장보다는 절제된 균형감이 돋보였습니다. 하얀 바탕에 푸른 물감으로 그린 그림이 있는 청화백자도 있었고, 아무 무늬 없이 흰 색만으로 형태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백자도 있었습니다. 살짝 두툼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형태, 군더더기 없는 곡선과 넉넉한 여백이 조선 사람들이 추구했던 미감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단순해 보이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단순함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숙련이 필요했을지 짐작하게 됩니다.
2. 산과 사람을 그린 그림, 조선 회화
전시장 한쪽에는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 같은 조선 시대 화가들의 작품이 걸려 있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익숙한 화가들이 실제로 그린 그림을 눈앞에서 보는 경험은 교과서 속 사진으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줍니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실제 우리 땅의 산과 강을 바탕으로 그렸기 때문에, 그림 속 풍경이 단지 상상이 아니라 현실과 이어져 있다는 감각을 줍니다. 멀리 있는 산은 먹을 연하게 써서 흐릿하게 표현하고, 가까운 나무와 바위는 더 진하게 그려 깊이감을 살려 놓았습니다. 산등성이를 따라 흐르는 구름, 골짜기 사이를 흐르는 물길, 산 아래 작은 집과 사람들까지, 전체적으로는 차분하지만 자세히 보면 곳곳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습니다.
단원 김홍도의 그림은 또 다른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 아이들과 함께 노는 어른들, 씨름을 하는 청년들 같은 장면이 유쾌하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인물들의 표정과 자세는 과장되게 표현된 부분도 있지만, 그래서 더 생동감이 느껴졌습니다. 한 점 한 점을 따라가다 보면, 조선 시대 사람들의 일상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져 묘한 친근함이 생깁니다.
3. 글씨에 담긴 성격과 정신, 서예 작품
서예 코너에서는 추사 김정희를 비롯한 여러 서예가의 글씨를 볼 수 있었습니다. 멀리서 보면 단순히 검은 선으로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선 하나하나에 힘과 리듬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추사의 글씨는 특히 강렬했습니다. 처음 보면 조금 삐뚤어 보이기도 하고, 획이 일정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다 보면 그 안에 단단한 구조와 균형이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글자는 굵고 길게 뻗어나가고, 어떤 부분은 숨을 고르듯이 여백을 충분히 남겨두었습니다. 마치 글씨가 한 사람의 목소리처럼 느껴져, 글자를 따라가다 보면 그 사람의 성격과 생각까지도 상상하게 됩니다.
4. 불교미술, 믿음이 만든 형상들
불교미술 코너에는 불상, 불화, 불교 의식에 쓰이던 다양한 공예품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금동으로 만든 작은 불상은 크지 않았지만, 얼굴 표정은 놀라울 만큼 섬세했습니다. 살짝 내려뜨린 눈, 미묘하게 올라간 입매, 안정감 있게 앉은 자세에서 조용한 평온함이 전해졌습니다.
불화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천 위에 안료를 여러 번 겹쳐 칠해 색감을 내는데, 옷의 주름 하나, 장식 하나, 배경의 구름과 연꽃까지 모두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종교적인 의미를 떠나서, 그림 자체만 보더라도 기술과 인내가 얼마나 깊이 쌓여 있는지 느껴졌습니다.
전시 구성이 주는 편안함
이 전시에서 인상 깊었던 점은 단지 유물 자체뿐만 아니라, 그 유물들을 어떻게 보여주고 설명하느냐였습니다. 작품들이 무작정 많이 전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각 공간마다 주제가 느껴지도록 적절한 수의 작품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각 작품 옆에는 짧지만 핵심을 짚어주는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어려운 용어만 나열해 놓은 것이 아니라, 시대적 배경과 작품의 특징, 왜 중요한지 등을 이해하기 좋게 정리해 두어, 글을 차근차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작품에 대한 관심이 더 깊어졌습니다. 전문 용어가 나오더라도 그 뜻을 함께 설명해주거나, 문맥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구성이라 부담이 덜했습니다.
또한 동선이 깔끔하게 짜여 있어, 한 작품을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다음 작품으로 시선이 옮겨졌습니다. 어느 한곳에 사람들이 몰려 붐비는 일도 많지 않아, 보고 싶은 작품 앞에서 마음 편히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전시장이 과하게 어둡지도, 너무 밝지도 않아서 작품 감상에 집중하기 좋은 분위기였습니다.
간송미술관 공간이 주는 느낌
간송미술관이 자리한 성북동은 서울 도심이지만, 조금만 올라가면 조용한 주택가와 오래된 골목이 이어지는 동네입니다. 미술관에 도착하면 먼저 느껴지는 것은 도시 중심부와는 다른 여유로운 공기입니다. 이런 주변 환경 덕분에,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마음이 한층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미술관 안은 전반적으로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였습니다. 예약제로 운영되다 보니 한 번에 들어오는 인원이 제한되어, 떠들썩한 소리보다는 작품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발걸음 소리가 더 크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자연스럽게 목소리도 낮아지고, 유물 앞에 서면 괜히 자세를 바로하게 됩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작품과 마주 앉아 대화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간송미술관이라는 공간은, 그냥 멋진 건물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이야기까지 함께 느끼게 하는 곳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라는 어려운 시대에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의 마음이 이 공간의 바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단순히 ‘예쁜 것’을 보러 간다는 느낌보다는, 우리에게 남겨진 소중한 것들을 잠시 만나러 간다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다음 전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
이번 ‘보화비장’ 전시는 이미 끝났지만, 간송미술관은 앞으로도 소장품을 주기적으로 공개해 왔고, 또 계속 그럴 것입니다. 언젠가 열릴 다음 전시를 기다리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예약과 시간 관리
간송미술관 전시는 대부분 사전 예약제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인기 있는 전시일수록 예약이 빨리 마감되니, 전시 일정이 공개되면 가능한 한 이른 시기에 일정을 확인하고 예약을 시도하는 편이 좋습니다. 관람 시간은 생각보다 금방 지나가니, 전시 시작 시간보다 너무 촉박하게 도착하지 않도록 이동 시간도 여유 있게 잡는 것이 좋습니다.
2. 작품을 보는 태도
전시장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전체를 한 번 쭉 둘러보고, 그다음에 마음에 남는 작품들을 다시 돌아보는 방식도 좋습니다. 어떤 작품은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지나치게 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볼수록 더 많은 것이 보이기도 합니다. 설명 글을 읽고 다시 작품을 보면, 같은 그림이나 도자기라도 전혀 다르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또한 작품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이걸 만든 사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이 시대 사람들은 어떤 세상을 살았을까?” 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는 것도 관람의 재미를 더해줍니다. 이런 상상은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부담 없이 자유롭게 떠올려 보면 됩니다.
3. 간단한 사전 공부의 힘
전시를 가기 전에 미리 간송 전형필 선생에 대해, 또는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조선 회화의 특징 같은 것을 조금만 알아보고 가도 전시가 두 배는 더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미리 본 정보와 실제 작품이 머릿속에서 연결될 때, “아, 이게 바로 그때 읽었던 바로 그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꼭 어려운 책을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간단한 개념 몇 가지만 알고 가도 충분합니다. 예를 들어, 고려청자는 색과 상감 기법, 조선백자는 단아함과 비워둔 공간의 미, 진경산수는 실제 풍경을 그린 산수화, 풍속화는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그린 그림이라는 정도만 알아도, 전시장을 돌면서 무엇을 봐야 할지 훨씬 분명해집니다.
4. 관람 예절과 촬영에 대하여
문화재 전시에서는 사진 촬영이 전면 금지이거나, 플래시만 금지되는 등 규정이 조금씩 다릅니다. 간송미술관 전시에서도 안내문을 통해 촬영 가능 여부가 명확히 안내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규정뿐 아니라, 다른 관람객들의 감상을 방해하지 않도록 소리를 낮추고, 작품과 진열장에 불필요하게 손을 대지 않는 것 역시 중요한 관람 예절입니다.
사진을 찍을 수 있더라도, 모든 것을 카메라에 담으려 하기보다는, 카메라를 잠시 내려놓고 눈으로 오래 바라보는 시간이 더 소중할 때가 많습니다. 결국 전시가 끝난 뒤에 또렷하게 떠오르는 것은 사진보다 그 순간의 공기와 느낌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간송미술관이 우리에게 남겨주는 것
‘보화비장’ 전시는 단순히 오래된 물건을 보여주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손길과 생각, 그리고 그들이 남긴 아름다움이 시간의 층위를 넘어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간송 전형필 선생이었고, 그가 지켜낸 것들을 지금 우리에게 보여주는 곳이 간송미술관이었습니다.
전시장을 나서며 가장 크게 느껴졌던 것은, 이런 유물들이 당연히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쳤고, 또 누군가는 그것을 연구하고 정리하며, 오늘 우리 앞에 조심스럽게 내놓았습니다. 그래서 유리 진열장 속에 놓인 작은 도자기 하나, 낡은 종이 위에 써 내려간 글씨 한 줄, 옅어진 색의 그림 한 장도 함부로 스쳐 지나가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을 품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또 다른 전시가 열리면, 그날의 ‘보화비장’을 떠올리며 다시 성북동 언덕을 오르게 될 것 같습니다. 그때도 역시, 조용한 발걸음과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오래된 아름다움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