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경이 막 시작되던 빅토리아 하버를 처음 마주했을 때, 눈앞 풍경이 낯익게 느껴졌습니다. 실제로는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데, 수없이 보았던 영화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겹쳐지면서 묘한 기시감이 밀려왔습니다. 그 뒤로 홍콩을 여행할 때마다 단순 관광지가 아니라, 영화 속을 직접 걸어 다닌다는 느낌으로 촬영지를 찾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침사추이, 스크린에서 튀어나온 풍경
홍콩 영화 촬영지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이 침사추이입니다.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동네이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수많은 명장면의 배경이기도 합니다.
청킹 맨션 앞을 지나갈 때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Chungking Express)》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금성무가 쫓던 금발 여인이 머물던 곳으로 등장하는 이 건물은, 실제로도 다국적 여행자와 상점이 뒤섞인 독특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내부는 다소 혼잡하고 낯선 분위기가 강해 가볍게 외관만 둘러보고 사진을 남기는 정도가 무난합니다.
하버 시티 근처 골목을 걷다 보면, 영화 속 스낵바 “Midnight Express”가 있었던 곳이 어디쯤일지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됩니다. 실제 촬영에 사용된 가게는 현재 영업하지 않지만, 좁은 골목과 오래된 간판, 사람들로 북적이는 분위기만으로도 《중경삼림》의 공기를 느끼기에는 충분합니다.
조금만 걸어가면 침사추이 프롬나드와 스타의 거리가 나옵니다. 이곳은 《영웅본색》, 《무간도》 등 여러 영화에서 홍콩을 상징하는 배경으로 등장했습니다. 해 질 무렵 빅토리아 하버를 바라보고 있으면, 화면 가득 펼쳐지던 스카이라인이 눈앞에 그대로 펼쳐져 묘하게 현실감이 사라지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특히 야경 시간대에는 영화 속 한 장면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기 좋습니다.
센트럴 & 미드레벨, 골목과 에스컬레이터의 도시
MTR을 타고 센트럴 역에 내리면, 현대적인 빌딩과 오래된 골목이 공존하는 풍경이 펼쳐집니다. 이 주변은 홍콩 영화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동네 중 하나입니다.
센트럴–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는 세계에서 가장 긴 옥외 에스컬레이터로, 아래에서 위로 천천히 올라가다 보면 《중경삼림》의 장면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왕페이가 양조위의 아파트를 힐끗 바라보던 장면처럼, 위아래로 엇갈려 움직이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보면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세트장처럼 느껴집니다.
근처의 포팅거 스트리트(돌계단 거리)는 가파른 돌계단과 양옆으로 이어진 상점들이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한국 영화 《도둑들》을 포함해 여러 작품에서 배경으로 등장했는데, 직접 걸어보면 화면으로 볼 때보다 훨씬 좁고 가파른 느낌이라 색다른 재미가 있습니다. 특히 할로윈 시즌에는 분장 소품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서서 영화 세트장 같은 풍경이 연출됩니다.
상환(Sheung Wan) 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만모 사원이 있습니다. 향 냄새와 붉은 기둥,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향 나선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 덕분에 여러 영화와 광고에 자주 등장해 온 곳입니다. 헐리우드 영화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에서도 홍콩의 전통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배경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센트럴 일대의 그레이엄 스트리트, 게이지 스트리트 같은 오래된 시장 골목은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In the Mood for Love)》가 떠오르는 공간입니다. 실제 촬영 세트는 다른 곳에 만들어졌지만, 이 지역의 오래된 건물과 계단, 시장 풍경이 영화 속 1960년대 홍콩의 정서를 만들어 내는 데 큰 영감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은 카페와 갤러리가 늘어 다소 현대적인 분위기가 강해졌지만, 이른 아침 시간에 걸어 보면 여전히 오래된 정취가 남아 있습니다.
몽콕 & 야우마테이, 네온사인의 밤거리
홍콩 특유의 번잡한 에너지를 느끼고 싶다면 몽콕과 야우마테이 일대가 가장 인상 깊습니다. 많은 홍콩 느와르와 멜로 영화가 이곳의 풍경을 배경으로 삼았습니다.
템플 스트리트 야시장은 해가 진 뒤부터 본격적으로 활기를 띱니다. 노점이 빼곡히 들어서고, 점술가와 길거리 음식, 기념품 가게가 한꺼번에 섞여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영화 《첨밀밀》에서 여명과 장만옥이 스쳐 지나가던 거리로도 알려져 있으며, 여러 범죄 영화와 액션 영화에서 홍콩 서민들의 밤거리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자주 등장했습니다.
근처의 야우마테이 경찰서는 영국 식민지 시기 건축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건물입니다. 《무간도》를 비롯한 홍콩 경찰·느와르 영화에 여러 차례 모습을 드러낸 장소로, 실제로 보면 영화에서 느꼈던 묵직한 분위기가 어느 정도 전해집니다. 최근에는 공공 서비스 센터 등으로 활용되고 있어 내부 출입이 제한될 수 있으니, 외관만 조용히 둘러보는 편이 좋습니다.
몽콕의 여러 거리, 특히 네온사인이 촘촘히 걸려 있던 구역은 《천장지구》, 《신불가사의》 등 수많은 작품에서 혼잡한 도심 풍경의 상징처럼 사용되었습니다. 예전보다 간판 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밤이 되면 빛과 사람, 차량이 뒤섞여 독특한 에너지를 만들어 냅니다. 인파를 피해 한두 블록 정도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영화 속 뒷골목 같은 조용한 풍경도 만날 수 있습니다.
란콰이퐁 & 소호, 홍콩의 밤을 걷는 기분
센트럴에서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란콰이퐁과 소호 일대가 나옵니다. 이 지역은 홍콩의 현대적인 라이프스타일과 영화 속 감성이 함께 살아 있는 곳입니다.
란콰이퐁은 바와 클럽이 밀집한 대표적인 유흥 거리로, 좁은 언덕길을 따라 각국 사람들이 모여드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굳이 어디에 들어가지 않아도 밤의 열기를 느끼기 충분합니다. 《중경삼림》에서 경찰 663(양조위)이 들르던 바의 분위기도 이 주변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실제 촬영 장소는 시기에 따라 바뀌었지만, 이 일대의 비좁은 골목과 간판, 늦은 시간까지 이어지는 음악 소리는 영화 속 장면을 떠올리기에 제격입니다.
소호 일대는 레스토랑과 카페, 갤러리가 이어져 있어 비교적 한적하고 세련된 분위기입니다. 언덕을 따라 난 골목을 천천히 걸어가다 보면, 현대 홍콩을 배경으로 한 여러 영화들이 왜 이곳을 즐겨 찾았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됩니다. 낮에는 브런치를 즐기는 사람들로, 밤에는 가벼운 술자리를 갖는 사람들로 채워져, 하루 중 어느 시간에 가도 다른 표정을 보여 줍니다.
빅토리아 피크, 스카이라인을 내려다보는 자리
홍콩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장면 중 하나가 바로 도시 전체 스카이라인을 내려다보는 장면입니다. 그 대부분이 빅토리아 피크의 전망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트램이나 버스를 타고 피크에 올라가면, 홍콩 섬과 구룡반도, 빅토리아 하버가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헐리우드 영화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를 비롯해 수많은 작품에서 이 풍경이 도시의 아이콘처럼 등장해 왔습니다. 낮에는 빽빽한 빌딩 숲이, 밤에는 끝없이 이어지는 불빛이 화면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라, 직접 서 있는 것만으로도 영화 속 클로징 장면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듭니다.
국제금융센터(IFC), 현대 느와르의 상징적 무대
센트럴의 IFC 타워는 현대 홍콩을 대표하는 초고층 빌딩 중 하나로, 특히 영화 《무간도》를 떠올리게 하는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유덕화와 양조위가 마주서던 마지막 장면의 빌딩 옥상은 실제 IFC 단지 내에서 촬영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반인이 옥상까지 들어갈 수는 없지만, 쇼핑몰과 주변 광장을 거닐다 보면, 영화 속 인물들이 어디쯤을 걸었을지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됩니다. 건물 외부에서 올려다보는 높고 매끈한 유리 외관과, 그 뒤로 이어지는 스카이라인은 홍콩 느와르 특유의 차가운 도시 이미지를 잘 보여 줍니다.
홍콩 영화 촬영지를 즐기는 실용 팁
영화 촬영지를 중심으로 홍콩을 둘러보면, 같은 장소라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생생하게 여행을 즐기기 위한 간단한 팁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 여행 전, 관심 있는 홍콩 영화를 한두 편이라도 다시 보고 가면 실제 장소에서 느끼는 감동이 훨씬 커집니다.
- 홍콩은 MTR과 버스, 트램이 잘 되어 있어 촬영지 대부분을 대중교통만으로 편하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 언덕과 계단, 오래된 골목을 많이 걷게 되므로, 구두보다는 운동화나 편한 샌들을 준비하는 편이 좋습니다.
- 사진을 찍을 때는 현지인들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도록, 특히 시장이나 사원에서는 한 번 더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촬영하는 것이 좋습니다.
홍콩을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여기, 어디 영화에 나왔었지?”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는 여행자가 아니라, 영화 속 단역 배우가 된 것처럼 도시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 시선으로 천천히 걸어 보면, 홍콩의 풍경이 훨씬 더 입체적으로 다가옵니다.